한량의 여행/13-14 나홀로 아일랜드


추석 다음다음 날!

이날도 어김없이 더블린 시내에서 실컷 이력서를 돌리고 이른 오후에 집에 돌아왔다.

이력서를 돌리며 거리를 다니던 중에 누군가가 팜플렛 같은 것을 주었는데,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살펴보니 '더블린 컬쳐 나이트 DUBLIN CULTURE NIGHT' 라는 이벤트의 팜플렛이었다.

상당히 두툼하고 깨알같이 글씨가 써있는 팜플렛이라 그냥 간단히 훑어보고 집에가서 집주인 아들래미 제이콥 (고3)에게 이거 뭔지 아냐고 물어봤는데, 그 팜플렛에 나와있는 온갖 문화행사들, 장소들을 무료로 입장해서 즐길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당시엔 없었지만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하는 '문화가 있는 수요일'이라는 이름의 뭐 그런거랑 비슷한 것 같다.)


오!! 대박!!!

안타깝게도 나는 그날 당일 알았을 뿐이고, 팜플렛 안에는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장소와 행사들이 당연히 '영어'로 깨알같이 설명되어 있었기에 그걸 다 읽는 건 불가능했다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대략 지도를 바탕으로 내가 가볼만한 곳을 몇군데 찍은 뒤 미리 신청할 곳은 신청하고 지도에 표시하는 등 들뜬 마음으로 알아보았다.

나가기 전에 제이콥에게도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봤는데, 제이콥은 축구하러 가야한다고 했다. (제이콥은 축구를 정말정말 좋아했다... )


어쨌든 제이콥이랑 같이 밖으로 나와서 시내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내가 첫번째로 방문한 곳은 애비 극장(ABBEY THEATRE).

당시 내 친구가 미국으로 교환학생 가서 쓰고 있는 영어 이름이 애비였기 때문에 왠지 더 끌렸었다ㅋㅋㅋ

정해진 극장 투어시간에 딱 맞춰 가자 사람들이 이미 대기해 있었고, 잠시 후에 저 사진 속의 남자가 가이드로 등장했다.






실제로 연극 복장을 입은 아저씨가 극장의 역사와 역대 배우들, 지금 하고 있는 공연 같은 걸 설명해주고 극장 내부도 구경시켜주었다.

무대에도 올라가서 관객석도 바라볼 수 있었고 천장이나 무대 뒤쪽처럼 평소 관객으로 갔을 땐 보기 힘든 곳들도 구경할 수 있어서 재밌었다.

가이드 아저씨가 프린지 페스티벌 같은 것도 설명해줘서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다. 

완벽하게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ㅋㅋㅋㅋ 나름 첫 투어는 선방한 듯했다.




첫 극장 투어를 마치고 나와서 거리를 걷는데 거리 곳곳에 컬쳐 나이트 현수막이 붙은 게 보였다.

평소에 그렇게 많이 지나다닐 땐 잘 신경을 안써서 몰랐는데, 이제보니 꽤 오래 전부터 홍보를 했던 것 같다.

이렇게 현수막에 나와있는 것 같은 컬쳐나이트 포스터가 붙어있는 장소라면 어디든지 그냥 들어가볼 수 있었다.

처음에 집에서 가보려고 했던 곳과 상관 없이, 그냥 거리에서 포스터가 보이는 곳마다 들어가보게 되었다.

사실 잘못 들어가서 완전 애기들이 하는 활동도 슬쩍 구경하기도 했다 ㅋㅋㅋㅋ




이렇게 몇군데 돌아다녔더니 어느새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더블린 시내 중심지는 리피강을 중심으로 지역이 나뉜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다리를 건너는데 문득 굳건한 사랑을 상징하는 자물쇠들과 함께 'Fuck Love'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군ㅋㅋㅋㅋ 하는 생각과 함께 그냥 이 풍경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해질녁 낡은 다리 위 사랑의 자물쇠와 FUCK LOVE 라니...




걷고 걷다가 템플바 부근까지 갔다.

이 사진에도 보이는 곳곳의 컬쳐나이트 현수막들!!!




걷다가 또 포스터가 붙은 곳을 발견하여 들어가보았다.

이름은 JAM ART FACTORY! 

잼병이 로고로 그려져 있어서 여긴 뭘까 싶었는데.. 




들어가보니 온갖 그림들이 걸려있고 디자인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틴틴 in 더블린이라고 써있는 이 그림엔 귀여운 틴틴이... 츄리닝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게 영낙없는 더블린의 젊은이...ㅋㅋㅋ 

그리고 더블린의 상징인 스파이어와 노란색 2층 버스도 보인다! 깨알같음 ㅋㅋ 




이렇게 활자와 서양화, 그리고 동화 섞어서 감각적으로 배치한 그림도 있었다.

그림이나 예술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지만 한국에서도 가끔 혼자 미술관을 가곤 했어서 그냥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밖으로 나와서 다시 간판을 보니 IRISH DESIGN 이라고 작게 쓰여있는게 보인다.

JAM ART라는 건 그림에 나와있는 것처럼 먹는 쨈이 아니라 즉흥적인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아이리쉬의 언어유희? ㅋㅋㅋ 역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재밌게 본 언어유희 광고가 있는데, 리들(LiDLE)이라는 대형마트에서 브랜드명을 활용한 언어유희로 'A Lidl Bit of Magic'이라는 슬로건을 쓴게 인상 깊었다)




구경을 마치고 나와 해가 저무는 더블린의 거리를 걸었다.

퇴근길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한 가운데, 나는 오랜만에 홀로 여행하는 기분으로 저녁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여기는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는데, 너무 좋아서 계속계속 앉아있느라 마지막으로 참여한 컬쳐나이트 행사!

이렇게 색색깔 예쁜 풍선이 매달려 있어서 1차로 시선을 끌고,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와 2차로 귀를 사로잡은 곳이다.

음악소리가 들리길래 안에 들어가 보았는데, 이미 공연이 진행 중이었다.




아늑하고 작은 공간이 사람들로 꽉 차있었고, 아담한 무대 위에 젊은 연주자들이 흥나게 연주를 했다.

온갖 악기의 총 출동이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 독주도 있었고 사진처럼 각양각색의 악기로 협주하는 팀도 있었다.

집에서 나올 땐 별 기대 없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좋은 음악을 무료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만나 진짜 땡큐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서 연주를 감상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많이 흘러있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하프 연주였다!

태어나서 하프 연주를 처음 들어봤다.

아일랜드는 이 나라의 대표적인 맥주회사 기네스에도 하프가 그려져 있을 정도로 하프가 유명하다. (하프가 아일랜드의 국장이라고 한다)

나는 심지어 하프도 이렇게 크기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고, 다양한 소리가 난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정말 고맙게도 이 하프 연주팀이 가장 오랜 시간동안 가장 다양한 곡을 연주해주어서 귀가 호강했다!! 

처음엔 잔잔한 하프연주로 마치 신화속에 있는 것같은 느낌이 들다가, 나중에는 씬나는 아일랜드의 전통음악을 연주하기도 하고, 막바지에는 정말 놀랍게도 레이디가가의 노래 메들리까지 하였다! 하프로!!! 

엄청난 공연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공연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니 정말 더블린 컬쳐 나이트는 이 행사 참석한 것만으로도 너무 멋진 경험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결국 아일랜드를 떠날때까지 못 가서 아쉬워했던 트리니티 칼리지의 해리포터 도서관도 이날 무료 개방이었다고 한다.... 약간.. 속이 쓰리긴 했다.. ㅠㅠ 나는 바보.. )





공연이 끝나고 거리로 나오니 어느새 해가 다 져서 캄캄해져 있었다.

사실 공연장에 들어갈 때 그냥 마구마구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들어간 거라서, 길치인 나는 나오자마자 내가 어디에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도도 열심히 보고, 사람들에게도 리피강이 어느 쪽이냐, 템플바가 어디 있냐 등등 내가 아는 지명을 물어물어서 길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추석이 지난 다음 다음 날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달이 아주 밝았다.

보통 쇼핑 거리는 이 시간 즈음이면 가게들이 문을 닫아서 사람이 별로 없는데, 이날은 컬쳐나이트라서 그런지 사람이 아직 꽤 있었다.




귀 호강하고 나와서 기분도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좋고, 밤하늘에 뜬 달도 휘영청 몹시 예뻐서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술 한모금 마시지 않았지만 어쩐지 달빛과 분위기에 취하는 느낌이었다.

맞다. 기분이 들떠서 반쯤 헤롱헤롱 했다.




구름이 걷힌 달도 무척 선명하고 밝았다.

나중에 아이리쉬 라디오를 들으면서 안 사실인데, 아일랜드는 별을 관측하기에도 참 좋다고 한다.

어쩐지 집앞에서도 밤하늘을 보면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이곤 했었다.




더블린에서 버스를 타고 우리 동네, 루칸으로 돌아왔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데 아무도 없이 고요한 길을 혼자 걷는 기분이 묘했다.

좀 전에 즐긴 컬쳐 나이트의 여운이 이어졌다.

바로 이틀 전 추석 때 느꼈던 소외와 허전함의 빈 자리가 다시 기쁨으로 채워졌다. 


2013년 9월, 낯선 곳에서 고군분투 하던 나에게 컬쳐나이트는 작은 선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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